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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2016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DAY 1. 피레네를 넘어 스페인으로

by 브로페 2017. 1. 16.


일시 2016년 7월 6일 (수)

여정 프랑스 생장피에드포흐(Saint-Jean-Pied-de-Port) - 스페인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도보거리 26.5km          누적거리 26.5km

숙소 Albergue de Roncesvalles-Orreaga


 새벽 일찍 일어난다고 일어난 게 6시. 허겁지겁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선다. 어젯밤의 그 방은 마치 중세 감옥같은 곳이었다. 돌벽에 돌바닥인 반지하 방에 습기는 또 어찌나 차던지. 주방에서 무료 아침식사가 있다길래 빵 몇 점 줏어먹는데, 도저히 목구멍으로 넘어가지를 않는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 아침 먹다가 배탈 날 것 같다는 생각, 길은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등등 온갖 잡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배낭은 갑자기 또 왜 이렇게 무거워지는지.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가보다. 안 그래도 날씨마저 무겁다. 어제 사무소에선 분명히 날씨 나쁘지 않다고 했었는데!

 생장에서 스페인 국경마을인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카를로스길과 나폴레옹길이 있는데, 각각 그 길을 개척한 사람의 이름을 땄다고 보면 된다. 카를로스길(Valcarlos)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가 스페인에 있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떠난 원정길에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 알고 있다. 조금 편한 대신, 경치가 그렇게 예쁘지는 않다. 

 나폴레옹길(Napoleon Route)은 정반대다. 피레네 산맥을 정면으로 넘어가는 길이라 길이 험한 대신, 경치가 아름다워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 루트다. 날씨가 나쁘지 않은 날에는 보통 나폴레옹길을 선택해서 가고, 폭풍이나 폭설로 인해 나폴레옹길이 통제되는 날에는(초봄까지도 피레네 산맥에는 눈이 많이 온다고 한다) 순례자 사무소에서 카를로스길을 이용하도록 권한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을 벗어나면 이 두가지 길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마을 성당 앞에서 만나 잠시 동행했던 한 영국 아저씨는 카를로스길로 갈 거란다. 오늘 날씨도 나쁘지 않은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한다.

"저번에 나폴레옹길로 갔다가 죽는 줄 알았거든. 순례도 끝내지 못했어."

 나는 애써 침착하려 하지만, 무거워진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저씨는, 그렇게 유쾌하게 말하면서 카를로스길로 떠났다. 내 마음에 만근추 하나를 달아준 채. 순간 카를로스길로 갈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처음부터 편한 길로만 가려 하면 나중의 일을 장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결국 브로페는 나폴레옹길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사진으로는 어떻게 보일 지 모르겠는데, 나름대로 포장은 잘 되어있다. 아직까지는 중간중간 마을도 보이고, 사람도 사는 것 같다. '혹시 여기서 쓰러지면, 그래도 누군가 도움은 주겠지' 하면서 계속 길을 오른다. 계속 가팔라지는 길을 걷고 있자면, 오늘의 코스가 한 편의 사기극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은 엄청 가파른 산을 타고 있는데, 길이 포장이 잘 돼있다 보니 이걸 산으로 생각을 못하고 그냥 시골길로 생각하게 되더라는 것.

 시골길에는 가축들이 많다. '방목'이라는 걸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나에게는 신기하기만 한 일이다. 말이 뛰어놀고, 양떼가 포장도로를 슝슝 지나다니는 길이다. 아딘가에 찾아보면 그들을 데리고 있는 목동이 보일 법 한데, 코뺴기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렇게 대놓고 풀어놨다가 나중에 찾으러 가면 주인을 알아본다는 걸까?

그렇게 길을 걷다보면 작은 식당 하나를 둔 별장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오리손(Orisson)이라는 곳인데, 사실상 마지막 휴식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식당 안을 흘끗 보니 여러 순례자들이 커피 한 잔을 곁들이며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있는 식수대에 가서 물을 채운다. 여기서 물은 진짜 생명수다. 수돗물 생수 이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니, EAU POTABLE라고 써진 식수대가 보이면 무조건 물을 채우도록 하자. 특히 이런 산행이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린 찬물 더운물 수돗물 생수 가릴 처지가 아니다.

물을 충전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에 다시 산행을 시작하면, 얼마가지 않아 포장된 길이 끊기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포장된 길은 계속 난다. 다만 순례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를 포장도로로 인도하지 않을 뿐이지. 가끔 길 옆에 누군가 텐트를 쳐놓고 안에서 자고 있을 때도 있다. 진짜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텐트 쳐놓고 자면 밤에 무섭지 않을까? 텐트 안에 있을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혹시 아까 내가 그렇게 찾고 있던 현지 목동은 아니었을까(...).

 위로 위로 올라갈수록 안개는 자욱해진다. 나중에 알고보면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지만. 저 앞에 가고 있는 순례자들, 저 뒤에서 따라오는 순례자들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자욱한 날씨가 계속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날씨들이 오히려 그 순간순간들을 더욱 몽환적으로 보이게 한다. 가끔 보이는 이상한 돌무더기들마저, '아 여기가 진짜 순례길이구나' 하는 느낌을 마구마구 준다.

 정말 힘들다보면 별별 소리가 다 들린다. 새소리도 하나 들리지 않는 이 길에 갑자기 떙그랑, 땡그랑, 방울방울 하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들어도 분명히 워낭소리인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이런 소리를 듣다보면, '드디어 하느님께서 날 데려가시려고 이러시는구나'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워낭소리마저 천국으로 가는 종소리로 들리게 하는 코스가 오늘의 코스다(...). 정말 힘들다.

 그렇게 걷다가 중간에 스페인 노부부 파티와 합류하게 됐다. 순례길의 특징은, 대충 말만 통하면 어디서든 합류하고 쪼개지는 게 가능하다는 것. 내가 가파른 길 홀로 터덜터덜 걷고 있으니 짠해보였나보다. 과일도 권하고, 물도 권하고, 내가 손에 들고 다니던 오늘의 식량도 배낭에 메다줬다. 안되는 스페인어로 어렵게 고마움을 표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그나마 할아버지 한분께서 영어를 좀 해서 그분과 많이 대화를 했다.

 한참을 그분들과 걷고 쉬고를 반복하다가 중턱 어딘가 순례자들이 많은 곳에서 쉬기로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 오늘 식량이 담긴 비닐봉지가 배낭에서 뜯겨져버린 것. 힘들어서 주저앉아버린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아까 그 할아버지께서 뛰어내려간다(사실 그분께서 묶어주셨다). 한 5분쯤 기다렸을까. 그거 어떻게 찾냐고 속으로 아쉬워하던 찰나, 할아버지께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올라오신다. 그런데 등 뒤에 감춘 손에서 내 비닐봉지가 나왔다! 오늘은 얄짤없이 쫄쫄 굶는 줄 알았는데, ¡Viva Abuelo!

 할머니 한 분께서 고지가 멀지 않았다고 한다. 젖먹던 힘까지 다해 산을 오르는데, 어째 길이 점점 진흙탕이거나 바위밭에 경사도 만만치가 않다. 안개도 점점 짙어지는 와중에 그놈의 정상이란 곳은 코빼기도 보이지를 않는다. 그런데 뒤에서 어떤 한국인 아저씨 한 분이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신다. 아니, 이렇게 가파른 돌길을 자전거까지 대령해서 오시다니, 대단하시기도 하여라.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뭐 그럭저럭 할만 하시단다. 어쩜 이렇게 힘든 순간에도 저렇게 웃고 계실까? 보통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렇게 돌길을 계속 오르는데, 어느 순간 정말 마법같이 안개가 싹 하고 걷혔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 순간 주위에 보이는 풍경이 모든 걸 설명해줬으니까. 고난의 산행을 거친 후에, 나는 결국 구름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 펼쳐진다. 구름 위에 산봉우리가, 마치 바다 위의 섬같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1분 전까지 폭풍전야처럼 어둡고 캄캄하며 음침했던 곳은, 거짓말처럼 깨끗하고 맑고 자신있는(...) 하늘로 바뀌었다. 아저씨들이 등산 다니면서 느끼는 성취감이 이런 것이었나,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면서 점심을 청한다. 배낭은 바닥 어딘가에 버려두고, 바위에 올라 아까 잃어버렸다 찾은 식빵과 꿀을 꺼낸다.

 점심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다시 걷기 시작하면, 이때부터는 평지와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마침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이 이 즈음해서 있어서, 스페인부터는 사실상 내리막길이라고 봐도 된다. 가끔 오르막길도 있지만, 이제까지의 오르막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편하다. 이제 문제는 지형이 아니라 날씨다. 그동안의 안개가 프랑스의 컨셉이었다면, 뜨거운 태양이 쨍쨍한 게 이제부터는 스페인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적절하게 쉬었다 걸었다를 반복하면서 산을 내려가다 보면,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게 된다. 

 숲길도 마냥 편한 길은 아니다. 그늘이 진 곳은 습하기 때문에, 흙길이 어느샌가 진흙탕이 되어 있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다. 아까 숲길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사실 두 개로 나뉘는데, 하나는 그나마 잘 정리된 자전거 도로이고(좀 돌아가야 한다), 하나가 숲길이었는데 아마 사람들이 좀 더 편한 자전거길을 많이 선택해서 그런가보다. 사람이 없는 숲에 나혼자 있는 기분 역시 이상하기 그지없다. 걸어도 걸어도 같은 곳을 걷는 느낌이고, 왠지 도적떼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상상마저 든다.

 

새벽 6시 반에 시작한 산행은 4시가 넘어서야 끝나게 된다. 숲길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면 드디어 사람이 사는 건물이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이다. 3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그 배 이상의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숙소도 있다. 카를로스길과 나폴레옹길이 여기서 합쳐지게 된다. 숙소에 짐을 풀고 더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저녁식사를 마친 후에 성당에서 주최하는 순례자 미사에 참석한다.

이상하다, 미사를 보는 신부님 옆에 보좌신부님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한 얼굴이 낯익다. 아까 길에서 본 것 같은데, 아까보다 얼굴이 좀 더 엄숙하다? 그랬다. 아까 돌길에서 자전거를 끌고 가던 그 온화했던 얼굴. 세상에, 그 아저씨가 한국인 신부님이었던 거다! 미사가 끝난 후에 짧게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까지도 계속 내 걱정을 하면서 혹시 몸이 불편하면 약을 좀 주시겠다고 한다. 그 날 하루만큼은, 그 신부님은 나에게 예수님과 다름없었다. 순례 1일차부터 이런 영적인 경험을 하다니... 성스럽다 성스러워!

  첫 날 산행에 10시간이 걸렸다. 다음 여행기에서 보곘지만, 하루 평균 보통 6~7시간 정도 걷는 순례길에서 오늘같은 코스는 정말 고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힘든 코스다. 혹시나 글을 참조하시는 분들은, 첫 날이라고 무시하지 마시고 단단히 준비해 갈 것을 권유한다. 피레네 산맥만 안전하게 넘는다면, 좋은 식사와 좋은 침대, 그리고 온수 샤워가 기다리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