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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3년의 회고록

브로페 2025. 6. 25. 00:22

 

얼마 전, 쿠팡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에게 3년마다 고비가 온다고 하더니, 이번에도 그 고비를 넘지 못한 것일까요. 하지만 너무나도 훌륭한 회사와 동료들 사이에서 고마운 경험들만 한 것 같아, 짧게나마 지난 3년의 회고를 남겨보려 합니다.

 

1. 합류와 적응 (1년차)

 입사 당시의 저는 SCM은 아무 것도 모르는 데이터 분석가였습니다. 고작 팀에서 진행했던 수요 예측 프로젝트 관련 내용을 귓동냥한 정도가 제가 아는 SCM 지식의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채용 과정에서 좋게 봐주신 부분이 있는지, 도메인 지식이 전무함에도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채용 시장이 활황이었던 그 당시 상황의 덕을 많이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합류 전부터 기대와 설렘 반, 그리고 걱정 반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도메인 지식이 없었던 것을 걱정한 나머지 "물류관리사 자격증 공부라도 해야 하나" 싶었으니까요.

 어찌저찌 입사한 후 처음 1년은 적응의 연속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확실히 One of a kind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쿠팡에는 데이터 분석가들을 휘둥그레 만드는 몇 가지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1) 너무나도 방대하고 다양한 데이터 - 하루치 데이터가, 집계에 집계를 거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소 2,000만에서 3,000만 행이 나오는데, 이런 규모의 데이터를 루틴하게 매만지는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원하는 데이터를 추출하는 쿼리나 짤 줄 알던 제가, 쿠팡에서는 성능과 비용까지 고려한 쿼리를 짜는 방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3,000만 행의 데이터를 보는 쿼리를 아무렇게나 짰다가는 하루종일 돌려도 데이터를 추출할 수 없었을 것이니까요. 양만 많기를 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데이터가 쌓여있는 EDW에 접속한 순간, 마치 보물 동굴을 발견한 알라딘이 되었달까요?

2) 모두나 '어느 정도' 사용할 줄 아는 SQL - 전에 다니던 회사들은 대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이 매우 기초적이었습니다. 업무 시스템에서 엑셀로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는데, 엑셀 최대 행수인 128만 행을 넘어가는 대용량 데이터도 엑셀로 모두 다루는 그야말로 원시적인 수준이었죠. 쿠팡에서 업무 시스템을 통해 데이터를 다운로드 받는 모습은 3년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팀원들 모두 자기가 다루어야 하는 데이터를 추출하는 쿼리를 몇십개씩 가지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수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데이터 분석가 입장에서 이런 환경이 어떤 의미인지는 아마 다들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석이라는 핵심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3) 숫자로만 말하세요 - 데이터 중심 일하는 방식의 혁신을 외치는 회사들도, 막상 임원 분들 눈 앞에 데이터를 들고 찾아가면 온갖 이유를 들면서 결과를 보지 않습니다. 아니, 우선 들고 가기까지 '준비'라는 것을 참 많이 해야 하죠. 추출하고 분석한 데이터를 팀 내부적으로 몇 번이나 검증하고, 검증이 끝나면 예쁜 장표에 옮겨담아야 하고, 그렇게 보고 자료가 모두 준비되면 비서를 통해 임원과의 미팅 일정을 조율해야 하고, 그렇게 찾아가서 데이터를 보여주어도 의사결정에 반영되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쿠팡은 그런 과정이 없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보고는 이랬습니다: 데이터를 집계해서 쿼리로 빠르게 추출한다; 추출된 데이터를 피벗하여 몇 가지 케이스를 만든다; 그 엑셀 파일을 그대로 스마트 오피스에 있는 상무님께 들고 간다; 그 자리에서 빠르게 확인하고 의문점과 보완점은 즉시 이터레이션한다. 물론 수많은 임원들 앞에서 진행하는 프레젠테이션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일상 속에서의 보고와 의사결정, 그리고 액션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한국 대기업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포인트를 알고 나니, 쿠팡에서 일하는 것이 한층 재미있어졌습니다. 초반 1년은 회사 데이터에 적응하고, 팀원 분들의 요청사항을  해결해주면서 SCM과 재고관리라는 도메인에 적응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전에 배경 지식이나 경력이 크게 없었지만, 모든 것을 데이터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데이터 분석가 포지션이어서 그런지, 순조롭게 도메인과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2. 전사 과제와 예상치 못한 방황 (2년차)

입사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무렵, 전사 차원에서 새로운 어젠다가 등장합니다. 그동안은 재고를 품절 방지 목적으로 관리해왔다면, 이제는 과재고를 방지하기 위한 재고건전성 지표와 액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죠. 그 업무에 제가 홀로 투입되어 고군분투기를 시작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와 지표들을 운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전까지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지표를 만들어내고, 운영하기 시작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없는 지표를 만들어내는 것은 창조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해당 업무를 맡게 된 후 첫 6개월은 계속된 실패의 과정이었습니다. 과거 사례를 찾아보려고 해도 참고할 만한 것이 많이 없었고, 새롭게 창조해내자니 빈약한 도메인 지식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와중에 생각보다 리더십의 푸쉬도 심하지 않아 다소 느슨해졌습니다. 푸쉬를 주지 않는다고 안일해지면 안 되는데 말이죠.

그렇게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연말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방황이 시작되었습니다. 쿠팡으로 온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 같아보였고, 커리어가 꼬인 것만 같았고, 생각이 안 좋은 방향으로 자꾸 흐르다보니 리더십과 회사에 대한 원망이 쌓이기도 했습니다. 수 년 간의 직장 생활을 거치며 심적으로 가장 고생했던 시기가 아마 이 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그래도 일은 계속된다 (3년차)

한평생 절망과 원망에만 빠져있을 수는 없죠.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신 빠르게 극복해내고 재고건전성과 관련된 일련의 프레임워크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룬 개발 성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재고건전성 지표 개발 → 재고건전성 대시보드 구축/운영 → 주간 액션 아이템 도출 및 콜아웃
→ 주요 원인 코드화 → 과재고 원인 분석 체계화 → Lesson Learned 기반 지표 고도화 → 대시보드 고도화 → ...

하나의 지표를 개발하고, 그 지표를 다각도로 분석할 수 있는 가시성을 대시보드를 통해 확보하고, 정기적인 콜아웃을 통해 과재고를 해소하고, 주요 원인에 대해 코드화하여 분석가 뿐만 아니라 일반 유저들도 손쉽게 원인 분석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이 모든 과정에 이터레이션을 돌리면서 지표를 고도화하는 작업까지의 데이터 분석 사이클을 돌려본 경험은, 감히 어디에서도 해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처럼 도메인 지식이 전무했던 상황에서 이룬 성과이기 때문에 더욱 유의미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위 업무를 단계별로 수행하면서 몇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아마도 데이터 분석가의 기본 소양이겠지만...

1) 지표를 개발할 때에는 그만한 과학적/통계적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회사의 타겟이 이정도니까 이정도 선에서 결정하죠?" 와 같은 방식은 지표 자체의 신뢰도를 크게 낮추며, 특히 쿠팡과 같이 데이터 리터러시가 매우 높은 회사에서는 신뢰도 낮은 지표는 순식간에 여러 조직에서 공격(?)당하게 되고, 결국 아무도 쓰지 않는 지표가 되어버립니다. 과거 데이터를 활용한 패턴 분석, 확보할 수 있는 회사 외부 레퍼런스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내가 만들고자 하는 지표의 과학적/통계적 신뢰도를 확보하는 것이 추후 사용성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2) 지표와 대시보드는 끊임없이 고도화되어야 합니다. 재고건전성 지표를 최초 설계한 것이 2023년 9월 경으로 기억합니다만, 제가 퇴사하던 지난 주까지도 해당 지표에 여러가지 예외 상황을 반영하려는 고도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비즈니스라는 것은 쉬워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매우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특히 쿠팡과도 같은 공룡 기업에서는 더욱 비즈니스 로직과 풀고자 하는 문제들이 매우 복잡합니다. 이 모든 것을 적절하게 녹여낼 때까지 지표는 그대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지표가 업데이트됨에 따라 대시보드에도 역시 추가적인 기능을 녹여낼 수 있어야 합니다.

3) 대시보드는 현상 → 원인 → 액션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전 직장에서 개발하던 대시보드는 주로 현상 위주로 가시성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고, 다차원 분석 정도를 제공했으나 한 대시보드에서 현상, 원인 그리고 액션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상적인 대시보드는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여 현상을 설명하는 정도가 아니라, 원인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액션 아이템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액션 아이템 도출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현상의 원인 정도는 유저들이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많은 데이터 분석가들이 대시보드의 심미성에 취한 나머지 이 명쾌한 원리를 망각하고는 합니다. 쿠팡 입사 전의 제가 그랬습니다...

4) 데이터 분석가 나만 아는 지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표의 기저에 숨어있는 로직은 굉장히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부분을 유저들에게 쉽게 보여주는 툴이 바로 대시보드죠. 하지만 다양한 내부 사용자들을 위한 편의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표는 나만 아는, 나만이 분석할 수 있는 지표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게 회사 안에서 나의 강점이 되고, 나는 대체 불가능한 데이터 분석가가 되는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새롭게 무언가를 분석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뺏어버리고, 나를 '재고건전성 원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지표와 대시보드가 완성되면, 해당 지표에 대한 분석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체계화하고 다시 데이터화하여 유저 친화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수행한 업무가 그랬습니다. 불건전한 재고에 대한 원인 분석을 케이스로 나누어 다층 코드화하고, 이를 유저들에게 배포하여 매핑된 코드만 봐도 어느 원인인지 바로 알 수 있게 했죠.

 

4. 쿠팡을 떠나보내며

여러 면접에 다녀보면 (실제로 쿠팡 재직 3년간 여러 번 타사 면접에 참여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3년동안 재고건전성 분석만 하셨어요? 다른건 안 해보셨어요?" 저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네, 실제로 저 혼자 A부터 Z까지 맡아 개발했고, 지속적인 이터레이션을 거치며 프레임워크 전체를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을 관리하는 것보다 더욱 뜻깊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3년동안 한 우물만 판 미련한 데이터 분석가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 자체는 여러 뻔한 지표를 동시다발적으로 관리하는 업무보다 훨씬 깊은 고민과 사고를 요하는 업무였다고 믿습니다.

블라인드 같은 곳에서 BA로 에고서칭을 하다보면 "쿠팡 BA의 풀네임은 BbobA이고, 데이터만 맨날 추출하는 쿼리머신이다"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는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만, 쿠팡은 내 의지에 따라 데이터 추출만 하는 분석가가 될 수도 있고, 정말 이니셔티브 하나를 잘 잡아서 지표 생성과 분석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하는 분석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회사나 결국은 자기 의지가 많은 것을 가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최소한 쿠팡은, 그런 분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복잡한 비즈니스 문제가 한가득 쌓여있는 보물창고입니다.

그래서 회사를 나온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쿠팡이 굉장히 매력적인 회사라고 믿습니다. 사실 퇴사가 화요일인데 월요일 밤 8시까지 야근을 하고 말았었죠. 마지막까지 제 쿼리와 문서를 정리하고 또 업데이트할 부분은 업데이트했는데, 제가 미련하고 정이 많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업무에 기여하면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으니까요. 미소진 연차가 20개 넘게 쌓인 건 좀 불만이지만, 그래도 제가 데이터 분석가로서 성장하는 데 큰 기여를 한 회사와 주변 동료 분들에게 다시 한번 깊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매출 40조의 유통 공룡이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은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쿠팡은 상시로 많은 포지션에서 채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혹시 관심 있으시다면, 지금 지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