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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EY/2016 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DAY 2. 여독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by 브로페 2017. 1. 16.

일시 2016년 7월 7일 (목)

여정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 - 수비리(Zubiri)

도보거리 21.7km         누적거리 48.2km

숙소 Albergue Zaldiko


 순례길을 처음 걷는 사람들의 원칙 하나: 절대, 절대 무리해선 안 된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자기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걸어야 한다. 특히 처음이라고 마음이 급한 사람들이 많다. 하루에 3~40km씩 걸으면서, "군대에서 행군도 해봤는데 이 정도야" 라고 자기 합리화시킨다. 명심하자. 군대에서도 3~40km 매일매일 행군하지는 않는다.

 스페인 국경 마을 론세스바예스에서 제일 가까운 중형급 도시는 팜플로나(Pamplona)다. 하지만 도보로 50km가 넘는 이 길을 하루만에 걸을 수 있는 순례자는 많지 않다. 보통은 그 중간쯤에 있는 작은 마을인 수비리(Zubiri)나 라라소아냐(Larrasoaña)까지 걷는다. 두 마을은 5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일단 수비리에 도착해서 시간 여유가 되면 라라소아냐까지 가기로 한다.

 해는 이미 서서히 뜨고 있다. 참고로 여름 순례길을 걷을 때, 해가 이미 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늦은 것이라고 봐도 된다. 많은 순례자들이 새벽잠을 설치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5시 반에 출발하면 일찍 나가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6시 반에 침대에서 일어났다면 이미 텅 비어있는 옆 침대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아침잠이 많은 나는 이미 해가 뜨기 시작한 뒤에야 허겁지겁 짐을 싸고 숙소를 나섰다.

따뜻한 음식과 편안한 침대를 제공해준 론세스바예스를 등지고, 수비리를 향해 출발한다. 처음 몇 km 정도는 길이 평지로 나 있어서 제법 걸을 만 하다.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아침에는 약간 서늘한 바람까지 불어주고, 이렇게만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숲이 그늘도 만들어주고, 더할 나위 없는 코스였다. 최소한 오전까지는.

 수비리까지 가는 길에 길만 있는 건 아니다. 군데군데 작은 마을들이 있는데, 원할 때는 언제든, 어디서든 쉬어도 된다. 특히나 식수대가 있을 땐 무조건 물을 충전하자. 여기서부터는 스페인이므로, EAU POTABLE가 아닌 AGUA POTABLE라고 써져 있을 거다. 아니면 아침 일찍 연 바(Bar)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와 함께 커피나 주스를 마셔도 좋다. 나는 중간에 있는 에스삐날(Espinal) 마을에서 한 번 쉬고, 비스까렛-헤렌디아인(Viscarret, Guerendiain) 마을의 한 바에서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스페인 현지 오렌지 주스는 즉석에서 짜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한번 마셔볼 것을 권한다. 당도 충전되고, 쉬면서 즐기기엔 딱이다.

비스까렛 마을의 초입에 있는 데나 오나 바(Bar Dena Ona)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 먼저 가던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고, 뒤따라 오던 친구들을 볼 수도 있다. 얼마나 쉬는지는 본인 선택이지만,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고 일어날 때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발이 적당히 쉬었다고 생각할 때 쯤이면 일어서야 한다. 늘어지게 쉬다가는 쬐는 태양빛을 피하지 못하고 얼마 가지 못해 다시 쉬어야 할 테니까.

 수비리로 가는 길에서도 몇 사람들을 만나 동행하곤 했다. 프랑스에서 오신 (이제는 은퇴하신) 수도사 한 분과, 스위스에서 온 (영어는 잘 못하지만 애써 커뮤니케이션은 잘 되는) 쾌활한 친구, 그리고 어젯밤에 묵었던 론세스바예스 숙소에서 내 아래층 침대를 썼던 네덜란드 친구까지. 각자의 종교에 대해,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끔은 실없는 농담도 한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나이가 어떻든 피부색이 어떻든간에 쉽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 쾌활하거나 묵묵할 수는 있지만,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 매몰차게 대하지는 않는다. 걱정말고 말을 걸어보자. 시작은 "Buen Camino"부터!

 수비리에 도착한 건 아마 오후 3시가 넘어서였을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의 코스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것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계속 반복되면서 나타나 순례자들에게 골탕을 먹인다. 그나마 숲길이 좀 있어서 망정이지, 숲길이 아닌 곳에서는 햇볕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기에 다음 마을에선 기필코 쉬어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걷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 앞에 보이는 게 수비리 마을이다. 생각보다 긴 코스는 아닌데, 하여튼 늦게 출발하면 이렇게 된다. 

 산에서 내려와 작은 개울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다리를 건너면, 깔끔하게 생긴 알베르게 하나가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본능적으로 '이 곳이 내가 오늘 묵어야 할 곳'임을 느꼈다. 라라소아냐? 이 햇빛을 받으면서 5km를 더 걸을 용자가 과연 있을까? 

네덜란드 친구가 만사 다 제쳐놓고 여기부터 들어간다. 좀 둘러보고 싶긴 했는데, 친구가 따라가니 왠지 가야 할 것 같아서 따라들어간다. 다행히 아직 방이 남아있었고, 세탁기도 보인다! 결국 여기, 알베르게 살디코(Albergue Zaldiko)에서 묵기로 했다. 온수샤워도 되고, 와이파이도 빵빵하고, 세탁도 된다. 세탁비가 좀 부담스럽긴 한데, 네덜란드 친구와 세탁물을 모아서 함께 돌리기로 했다.

 씻고 나와서 마을을 좀 둘러볼까 하는데, 아직 햇빛이 강하다. 문득 아까 건너온 다리 밑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던 사람들이 떠올라 그 쪽으로 향한다. 수영은 못하지만, 간단하게 족욕은 할 수 있겠지 하고 발을 물에 담그는데, 얼음장이 따로 없다. 하루종일 못난 주인을 받치느라 고생한 내 두 발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족욕뿐이다. 한여름에 흙길을 걸으면 발이 정말 뜨거워진다. 중간중간 이렇게 식혀주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족욕이 끝나고 낮잠을 청하다가 네덜란드 친구가 나를 꺠운다. 자기가 여기서 알게 된 사람 열댓명이 있는데, 같이 저녁식사를 하지 않겠느냐고. 거절할 이유가 없다. 당장 콜! 외치고 같이 나가니, 역시나 국적이 다양하다. 캐나다,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등. 근처에 있는 오기 베리 카페 델 카미노(Ogi Berri Cafe del Camino)에서 저녁을 함께한다.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데, 프랑스 아저씨 한 분이 정치 얘기를 꺼낸다. 도대체 트럼프는 무슨 일이냐고, 한국과 많이 다르다. 한국에선 처음 만나는 사람과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 중 하나가 정치 이야기 아니었던가! 그런데 여기선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트럼프의 흥행, 브렉시트, 프랑스의 극우 세력, 버니 샌더스, 그리고 저스틴 트뤼도 총리까지. 물만난 물고기가 이걸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정치 이야기(...)를 계속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는데, 웬 스페인 노부부께서 내일 어디서 묵을거냐고 물어보신다. 망설임 없이 "팜플로나요" 라고 했는데, 내일 팜플로나에서 묵을 수 없다고 내게 말해준다. 이게 무슨 소리래? 알고보니, 오늘부터 팜플로나 최고의 축제인 '산 페르민(San Fermin'이 시작돼서 팜플로나 시내의 모든 알베르게가 일시 휴업에 들어갔다는 것! 오우야, 이 분들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허겁지겁 인터넷을 찾아 팜플로나 다음 마을인 시수르 미노르(Cizur Minor)에 있는 한 알베르게에 전화해 예약을 잡는다. 이분들 아니었으면 내일이 어떻게 됐을 지, 깜깜하다.

 밤이 되어가지만 해는 아직 지지 않는다. 밖에 또각또각 하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순례자 하나가 말을 타고 돌아다닌다. 여기 산티아고 순례길의 순례자는 이동수단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뉘는데, 도보순례자, 자전거순례자, 그리고 바로 이 승마순례자다. 듣기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또 처음이어서, 한동안 넋놓고 지켜봤다. 말 타고 순례하면 진짜 중세 순례 느낌이 날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