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6년 7월 8일 (금)
여정 수비리(Zubiri) - 팜플로나(Pamplona) - 시수르 메노르(Cizur Menor)
도보거리 24.3km (5km 버스 이용) 누적거리 72.3km
숙소 Albergue Familia Roncal
아침 일찍 나 홀로 수비리를 나섰다. 해가 뜨고 난 후에 걷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어제 너무 잘 알아버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두울 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아마도 어제 같이 놀고 즐겼던 사람들은 뒤에다 버려두고 왔나보다. 뭣이 그렇게 급했을까? 웃긴 건 그렇게 일찍 출발하고도 이 날은 고생에 고생의 연속이었던 것. 수비리를 벗어나자마자 울창한 숲길에, 공삿길에, 공장지대에.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일관성있으면 차라리 마음을 놓기라도 하는데, 이 날의 코스는 오르다가 내리기를 수십번 반복하는 길이었다.
아침 해가 완연히 뜨기 전에 한 숲길로 들어섰다. 숲길조차도 좁고 넓기를 계속 반복해서 차츰 순례길의 변덕에 대해 고민하던 찰나, 길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을 발견했다. 어제 수비리에서 했던 개울가 족욕이 참 맘에 들었나보다. 길가에 있던 간이의자 위에 신발과 양말을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바로 개울에 발을 담갔다. 수질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뜨거워진 발을 식혀줄 무언가가 꼭 필요했으니까.
그렇게 넋놓고 족욕을 즐기고 있었는데, 길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제 만난 네덜란드 친구와 어제 처음 만난 프랑스 친구가 함께 걷고 있었다. 아마 나보다 좀 늦게 출발했나본데 쉬는 동안 다 따라잡혔나보다. 그래도 기분 좋았다. 왠지 아침일찍 친구를 버려두고 왔다는 죄책감에서 해방된 탓일까. "따라잡아줘서 고마워, 친구들!"
가끔 만나는 바에서 오렌지 주스나 한잔 하면서 계속 걷는다. 공영 주차장같은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걷는다. 가파른 산비탈에 홀로 난 좁디좁은 길을 걷는다. 어느 새 그 두 친구는 사라지고 없다. 해가 중천에 뜬 탓에, 내가 좀 쉬엄쉬엄 가려고 하니까 일어난 일이다. 순례길은 생각보다 개인적인 길이다. 언제든지 함께할 수 있는 만큼, 언제든지 헤어질 수도 있는 곳이다.
팜플로나에 다다를 즈음 해서 그 외곽 마을인 비야바(Villava)에 도착해서야 친구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팜플로나의 순례자 숙소가 축제로 인해 전부 문을 닫은 관계로, 프랑스인 친구는 이곳에서 묵기로 결정했고, 네덜란드 친구는 시내 호텔을 예약했다고 한다. 나는 팜플로나를 지나 시수르 메노르까지 가야했기에,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외곽 마을이어도, 팜플로나 시내까지 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지친 몸이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참을 걸어 팜플로나 도심인 시타델(citadel)에 이르렀다. 시타델을 우리나라로 치면 사대문같은 느낌이다. 견고한 성곽 안에 들어가있는 도심이니, 적절한 비유다 싶다. 어쨌든 여기에서 네덜란드 친구와 나는 헤어졌다. 친구는 하루를 쉬어갈 생각이라고 한다. 내가 어딘가에서 하루를 쉬지 않는 이상, 앞으로 마주칠 일이 없을텐데. 아쉬우면서도 이런 게 또 순례길의 묘미라며 애써 쿨한 척 서로 껴안아주고 헤어진다. 친구는 시타델 밖으로, 나는 시타델 안으로 들어간다. 혹시라도 안에 남은 숙소가 있을까 두리번거리면서.
사실 두리번거릴 새도 없이 성곽 안의 풍경에 압도당해버렸다. 축제가 어떤 건지를 대충만 전해듣고 와서 그런가. 온 사람들이 전부 위아래 흰 옷에, 목에는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그 한가운데에 땀에 젖은 동양인 순례자 하나가 얼타고 있으니까, 사람들 시선이 다 나에게 쏠린다(뻥이 아니라 진짜다). 신기하다는 눈빛도, 낯설어하는 눈빛도, 쟤는 왜 저래 하는 경계의 눈빛도 전부 느꼈다. 시타델에 들어서자마자, 얼른 여기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시타델 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동네 축제가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이(여기서 지역이라 하면 보통 주 단위를 말한다. 그러니까 나바라 주 전체를 말한다) 전부 모이는 어마어마한 대축제였던 거다. 어렵사리 인포메이션 센터에 도착하는 데 30분, 그 지옥을 다시 빠져나가는데 30분이 들었다. 게다가 나갈 때는 퍼레이드 행렬에 갇혀서 어쩌지도 못하고 끌려갈 뻔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겠어!"
안타깝게도 퍼레이드에 휩쓸리다보니까, 더 이상 걸을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한 5km 정도만 더 가면 숙소인데, 이미 예약 취소 기한인 오후 3시가 다 되어간다. 전체 순례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다.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15분 정도를 간 것 같은데 어느새 숙소가 있는 시수르 메노르 마을에 도착했다. 분명히 5km를 걸어서 가려면 한시간 넘게 걸리는 게 맞는데, 문명의 이기가 이렇게 편하다는 사실을 이제와서 깨닫게 된다. 앞으로는 버스를 욕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숙소로 향했다.
꽤 넓은 숙소에다 오랜만에 1층 침대를 얻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각을 재보니까, 왠지 숙소에서 쉬다보면 하루가 아까울 것 같았다. 시타델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는 축제가 한창인데! 다시 못 겪을 지도 모르는 축제라, 짐 풀고 씻자마자 바로 팜플로나 시타델로 향했다.
혹여나 모르는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팜플로나의 산 페르민(San Fermin) 축제는 말 그대로 성인 산 페르민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축제다. 아까 말했듯이 나바라 주 전체를 아우르는 축제인만큼, 규모도 기간도 어마어마하다. 시타델 안에서 하루종일 열리는데다, 일주일을 축제 기간으로 잡는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전부 일주일동안 시타델에서 먹고 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추고 노는 셈이다. 누가 정열의 나라 아니랄까봐, 화끈하다. 산 페르민 축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하자.
산페르민의 백미는 아침 8시에 열리는 소몰이 이벤트다. 듣기로는, 시청에서 팜플로나 스타디움까지 길을 하나를 낸다고 한다. 길 양옆을 방벽으로 막고, 사람들이 그 길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시청에서 황소를 풀어버린다. 황소는 미친듯이 스타디움까지 달리고, 사람들은 황소를 잘 피해서 살아남거나(...) 스타디움까지 도망가면 된다. 이게 진짜 보기보다 위험한데다 동물학대 논란도 있을 법 한데, 그래도 산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내내 이 이벤트는 계속된다. 게다가 지역방송들이 전부 생방송으로 중계를 해버린다. 스페인, 생각보다 무서운 동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놀기 위해 팜플로나로 향한다. '성스러운' 순례라고 시작한 길이 3일만에 향락에 굴복했다. 뭐라도 좋으니 일단 보고 듣고 마시자!는 마음으로 다시 시타델 한가운데의 인포메이션 센터로 향한다. 가는 길에 나도 유니폼을 맞춰야겠다 싶어 흰색 티셔츠와 빨간 스카프 하나를 장만한다. 또다시 아웃사이더라는 눈빛을 받기는 싫었으니까.
그렇게 인포메이션 센터 앞의 울타리에 걸터앉아 인간군상이 놀고 먹는 장면을 지켜보며 흐뭇해하고 있는데, 웬 금발 백인 남자가 어색한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온다. 응? 이 사람 스페인 사람 아닌가? 하면서 얘기를 해보는데, 엥? 자기는 덴마크 사람인데 한국에서 공부한 적이 있어서 물어봤다고 한다. 한국 어디에서 공부했냐고 물어보니까,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인 한양대(...)란다. 헐, 너 마장동 아냐?고 물어보니까, 자기 마장동에 살았었다고(...) 한다. 아니 내 친구들도 모르는 마장동을 아는 덴마크 사람을 스페인 변방도시 팜플로나에서 만나다니... 기분 묘하다.
그렇게 온갖 얘기를 주고받았다. 자기가 한국에선 면도 깔끔하게 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닉쿤이라고(...) 그랬다나, 하루는 소주를 너무 마시고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공항철도 타고 인천공항에 가고 있었다나, 압구정 사는 갑부 친구가 야경도 보여줬다나.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얘기하고 있는데, 알고보니 이 친구, 패거리를 몰고 다닌다. 나쁜 뜻은 아니고, 바로 옆에 온갖 국적을 가진 외국인 한 무리가 백팩에 맥주를 가득 넣어두고 놀고 있었다.
한명씩 소개를 받는다. 수단에서 온 친구, 알제리에서 온 친구, 폴란드에서 온 친구, 영국에서 온 누나까지. 역시나 술취한 사람들이랑 친해지기가 제일 쉽다. 안에 뭘 탔을지도 몰라! 라고 하는 속마음은 묻어두고 이 친구들이 권하는 맥주를 한캔, 두캔 마시기 시작했다. 어차피 해도 늦게 지는 걸, 오늘 하루쯤은 정신줄 놓아도 될지 몰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 사이 영국인 누나는 내 고장난 샌들을 고쳐줬고, 폴란드인 친구는 오토바이를 타고 스페인 여행을 다닌 얘기를 해줬다. 역시나 세상엔 재밌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정신을 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쯤 더 묵을 거면 미쳐도 상관없을텐데, 나는 내일 가야 할 길이 있었던 순례자였다. 안타깝지만 나의 여행은 마냥 재미만 있는 여행은 아니었기에, 애써 만류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다시 숙소로 향했다. 다시 간다고 하면 반드시 하루를 묵을텐데 말이지. 그 때는 그냥 겁이 났던 것 같다. 하루하루 철저하게 걸어야 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이었을까. 웃긴다. 어차피 넌 오늘 버스틀 타버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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