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뻔할 것 같았다. 이런 식의 SF영화를 한두편 본 게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내가 생각하는대로 결말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흔한 시나리오 있잖아. 아무 말 없는 외계인이 뜬금없이 등장해서 아무 짓 안하고 있다가 지구인이 선빵 날려서 역공 당하고, 결국 누군가가 희생해서 어찌저찌 중재되는, 그런 시나리오를 사실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평이 좋다. 도대체 저런 뻔한 플롯에서 어떤 신선함이 보인다는 건지, 로튼토마토 지수마저 94% 신선함이다. 아무리 상영 초반이라도 이렇게 반응이 좋을 수가 없는데, 뭐지? 나도 모르게 일단 예매부터 하고 본다. 로그원 이후로 SF영화를 본 적도 없으니, 오랜만에 시간이나 죽일까 하고 영화관을 찾았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나의 엄청난 착각이었다.
상식파괴가 주는 어마어마한 쾌감
네이버나 영화 예고편이 설명하는 시놉시스는 너무 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 도처에 사과 잘 깎은 모양같이 생긴(...) 외계물체가 도착하고, 주인공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내용. 아, 설마 「지구가 멈추는 날」과 같은 내용인가, 식상한가, 하고 생각이 들 만큼 진부한 플롯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뭔가 이상해진다. 갑자기 언어학 이야기가 나온다. 다큐인가? 그런데 스토리가 꽤나 진지하게 흘러간다. 외계인과 직접 대화를 시도하는 인간 캐릭터는 처음 보니까. 그리고 그 대화의 매체가 문자인 것은 더더욱 없던 스토리다.
(스포주의) 영화가 여기에 꽤 강력한 가정 하나를 주입시킨다. "언어는 그 사용자의 사고방식을 결정짓는다."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이 문장 하나에 영화는 한 가지 가정을 덧붙인다. "초월적 시간 개념을 가진 언어를 배운다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볼 수 있다." 이 가정이 영화 후반부에 밝혀지면서, 이제껏 과거라고 알고 있었던 주인공의 모든 회상이 더 이상 회상이 아니라는 엄청난 반전이 숨어있다.
컨택트에 나오는 외계인의 문자. 둥글게 되어있는 것은 이들이 이미 시간개념을 초월했음을 의미한다. (출처: 비즈니스 인사이더)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 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머릿속은, 사실 미래였다. 시간개념을 초월한 외계인의 문자로 소통을 시작하면서 주인공 역시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이용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영화의 기본 플롯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영화 안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역할을 하지만, 여태껏 이런 소재가 딱히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시간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우리의 머릿속에 엄청난 충격이 스쳐간다.
시간이 뒤틀리니 장면 장면이 하나하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과거에 이미 죽은 딸이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의 죽음은, 그리고 그 딸과의 추억(이것 역시 미래의 기억이다)을 통해서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 그리고 일찍 죽을 딸의 운명을 알면서도 기꺼이 낳겠다고 하는 마지막 장면은 여러 철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과정을 그린 컨택트 특별 영상
또 하나의 명작 탄생?
영화는 원작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SF 단편소설을 각색하여 제작되었다. 소설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초월하는 언어'라는 발칙한 주제는 확실히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좋은 개념이다. 그리고 원작을 영화로 잘 만들어낸 드네 빌뇌브 감독 역시 칭찬받아 마땅하다. 외계인과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플롯이 탄탄하고 매 순간순간 몰입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연출과 음향효과를 최고로 치고 싶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같이 SF계 거장이 될 만한 자질을 갖춘 젊은 감독인 나타난 것 같다.
이쯤 되니, 드네 빌뇌브 감독의 차기작인 「블레이드 러너 2049」가 기대된다. 절제된 액션으로 철학적 사유를 하게 만들었던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속편을 이 감독이 만든다고 하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연출로 우리를 더 흥분하게 할지, 올 10월을 기다려보자.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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