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로그원 특별전을 보러 스타필드 하남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왕십리역까지 가서 5호선 플랫폼까지 도착한 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뭔지 모를 귀찮음이 엄습했다. 스타필드 하남으로 가려면 강동역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다시 하남까지 가야 하는데, 내가 저거 하나 보려고 평생 안 가본 하남까지 가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어차피 5호선 플랫폼까지 와 버린 거, 5호선 근처에서 하는 전시회가 없나 내 이전 포스팅 [지극히 주관적으로 가볼만한 전시회 모음]을 뒤져봤다. 마침 광화문역 근처 세종문화회관에서 「훈데르트바서 특별전」이 열린다고 해서, 겸사겸사 교보문고도 갈 겸 광화문으로 향했다. 자주 사용하는 티몬을 찾아보니 평일 오후 4시 30분부터 8시까지 해피아워 추가할인을 해준다고 해서 입장권을 모바일로 바로 구매했다.
「훈데르트바서 특별전」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다. 광화문 광장 옆에 거대하게 지어진 세종문화회관 본관 옆에 있는 미술관으로 가야 전시회 관람이 가능하다. 특별전이 열리는 동안은 미술관 입구를 아예 특별전 홍보물로 도배해놓았으니,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다. 티몬으로 예매해가면 전화번호 뒷자리 확인만으로 발권이 가능하다.
입장하기 전에 간단하게 훈데르트바서에 대해 찾아보는 것이 좋다. 프리덴스리히 훈데르트바서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및 건축가 겸 환경운동가다. 2000년에 세상을 떠나 지금은 작품으로만 남아있는 사람이며, 그의 예술작품에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했던 사회예술가다. 예술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행위는 상당히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과연 내가 그림에 숨겨진 훈데르트바서의 암호를 알아낼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디오 가이드든 도슨트든 해설할 수 있는 무언가를 옆에 두고 전시회를 감상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오디오 가이드도, 도슨트도 없이 입장했는데, 그의 작품이 굉장히 난해한지라 작품 하나하나를 이해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제목과 그림이 머릿속에서 매치가 되지 않고, 이 그림이 저 그림 같아보인다. 지하 전시관으로 내려가기 전에 나오는 영상을 봐야 그제야 이해가 어느 정도 될 정도로 작품이 어려우니, 미술에 문외한이다 싶은 사람들이라면 가이드를 반드시 붙이는 것을 추천한다.
내맘대로 해석: 훈데르트바서의 특징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에는 쉽게 인지할 수 있는 특징 몇 가지가 있다. 인물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하는 양옆으로 가늘게 그린 눈, 밭 전자(田)에서 획 하나 빠진 모양의 창문, 선으로 표현하는 빗줄기와 점으로 표현하는 빗방울, 강렬한 원색 사용, 나선 패턴 등이 그런 특징인데, 작품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해석이 어렵다면 그의 여러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적인 패턴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의 작품 안에 존재하는 나선(spiral)은 순환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삶을 나선으로 표현한 것으로, 한때 일본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한 그의 경험이 영향을 미친 듯 하다(참고로 일본인 부인이 있었다). 또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물방울은 작품마다 서로 다른 색을 가지고 있고 어느 그림에서는 심지어 여러 색을 층층이 띄고 있기도 하다. 특히 붉게 묘사된 물방울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빗방울을 자연이 흘리는 피눈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작품명을 유의깊게 보자). 그의 붉은 빗방울은 환경 파괴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인 셈이다.
또 하나의 특징 중 하나는 바탕에 네모난 타일(?)이 겹겹이 쌓여있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묘사할 때나, 자연을 묘사할 때나 그 배경에 밭 전자(田) 모양의 창문이 패턴같이 우수수 나타난다. 실제로도 그는 건축 디자인을 할 때도 창문에 상당한 애착을 가진다. 작품 안에서의 이 창문은 도시의 상징, 인간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인간의 탐욕, 도시의 자연파괴같은 하나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한편, 이번 특별전에는 훈데르트바서의 건축 디자인도 엿볼 수 있다. 건축을 따로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그의 자연친화적인 성향을 건축 디자인으로 녹이면서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디자인한 건물들은 대개 녹색으로 물들여져 푸르다. 지붕이나 주변에는 항상 나무나 식물이 심어져있고, 마치 안토니 가우디를 연상시키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건축에 입혔다. 저 모형들은 대부분 실제로 지어져서 아직 오스트리아에 남아있다. 마치 바르셀로나에 가우디의 건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오스트리아 빈과 각지에 훈데르트바서의 건물들이 존재한다.
따로 해설을 준비하지 않았거나 훈데르트바서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하다면,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준비된 영상을 꼭 보는 것을 추천한다. 훈데르트바서의 일상과 그가 직접 말하는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이거니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해설도 함께 들을 수 있다. 배경음악도 구수하니 좋았는데.
미술 작품이나 건축 디자인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실생활에 쓰이는 제품들에 대한 디자인도 같이 했는데, 아마도 훈데르트바서의 시그니처 제품은 바로 부엽토 변기일 것이다. 배설물이 자연으로 더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이 변기는 훈데르트바서 본인이 집에 설치하고 애용했다고 한다. 단지 미술작품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사소한 실생활에서도 환경보존에 도움이 되는 제품들을 고안하고 사용한 점에서 그는 행동하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다.
전시회 끝자락에 항상 있는 기념품샵에서는 조금 이색적인 행사를 진행한다.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엽서에 자신이 원하는 문구를 캘리그래피로 예쁘게 적어주는 이벤트가 진행중인데, 엽서 기본 가격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기념품 엽서보다 더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도 모르게 하나 사게 된다. 캘리그래피를 추가할 경우, 본인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추가비용을 지불하면 된다. 현금 꼭 챙겨가자.
작가님께서 글을 쓰시는 동안 계산대 앞에 놓여진 구구절절한 글이 눈에 들어온다. 이번 전시회를 너무 감명깊게 본 한 대학생이 보낸 편지인데, 예쁜 손글씨와 사실적인 그림이 시선을 잡아챈다. 우리에게 유명하고 친숙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을 통해 사람들의 가슴속에 큰 울림을 주는 것을 봐서는, 훈데르트바서는 훌륭한 예술가였음이 틀림없다. 기념품샵에 와서야 복잡했던 머리가 정리되고 가슴속이 녹색으로 푸르게 훈훈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는 동안, 내 엽서에는 내가 특별히 골랐던 문구 하나가 적혀나왔다. 훈데르트바서 자신이 했던 말은 아니지만, 영상 속에서 흘러나온 노랫가락 한 구절이 의미심장해서 그것으로 특별히 부탁했다. 정갈하게 포장된 엽서 한 장을 품에 안고 미술관 밖으로 나간다. 공기는 탁하고, 주위는 시끄러운, 어쩌면 훈데르트바서의 취향은 전혀 아닐 그곳으로.
"직선자를 믿지 마세요. 둥근 집에서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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